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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k-pop

데미안 - 심규선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에는 모범적이고 신실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평범하고 심약한 싱클레어와 어른스럽고 강인하면서도 신비한 눈빛을 지닌 데미안이 등장한다. 그리고 둘은 한 사건을 계기로 마치 영혼의 끌림처럼 운명적인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군대 시절 내가 있던 내무실은 건물 가장 우측에 위치해 있었는데, 주위에서는 한마디로 ‘좆같은 7내무’라고 불렀다. 알고보니 대대로 부대에서 역대급으로 악명 높은 병장들을 수차례 배출한 나름 전통의 명가였기 때문이었다.

싱클레어처럼 유리 같은 마음을 지닌 나는 이처럼 폭압적인 환경의 막내가 된 것이 숨이 턱하고 막혔다. 그래서 주변에 마음을 나눌 만한 존재가 있기를 바랬지만 아무리 지켜 봐도 가해자와 피해자, 방관자들만 존재할 뿐 좀처럼 그럴 만한 인물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숨 죽이며 지내던 수개월 이후, 인사과에서 같이 근무하던 상근 예비역 경리계가 전역을 하고 경리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을 옆 중대에서 급히 충원해 오게 된다. IMF 여파로 지금은 사라진 부산 지역의 한 은행에서 재직 중에 입대한 그는 상고 출신에 나이는 나와 동갑이면서 5개월 고참이었다. 나이에 비해 훌쩍 어른스러웠던 그는 크고 작은 일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으며 같은 나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지혜롭고 또한 정의로웠다. 그리고 은행에서 작지만 꾸준히 월급이 나온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늘 후한 인심을 베풀곤 했다.

그를 점차 인간적으로 겪으면서 나는 드디어 기다리던 데미안 같은 존재가 나타났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싱클레어와 데미안처럼 금새 친해졌고 고참과 후임의 관계를 넘어 신의와 우정을 나눈 친구 또는 형제처럼 지냈다. 그리고 굳이 말로 약속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둘 다 나란히 내무실의 분대장을 맡게 되면서 험악한 분위기를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다.

병장이 되면 특정 먹이사슬에서 정점에 오르게 되고 내무실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게 된다. 그래서 빨래, 전투화 닦기, 사물함 정리, 총기 관리 등 자질구레한 일들은 후임들이 대신 해주는 것이 당연하고 오랜 관례였다.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그와 나는 힘을 손에 쥔 이후 그런 류의 허드렛 일을 후임들에게 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관례처럼 내무실에 전해 내려오던 악습 들을 하나둘씩 무시해 나갔다. 나 혼자 만으로는 엄두를 내기 힘든 일이었고 그가 옆에 같이 있었기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내무실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어 갔다. 이제 아무도 우리 내무실에 ‘좆같은’ 따위의 수식어를 붙이지 않았고 주변 내무실의 일이등병 녀석들이 점차 우리를 부러워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의지했던 그마저 전역하고 내가 최고참이 되었던 어느 날 내 군생활 최대의 실수를 하게 되는데, 고해성사를 하자면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 만큼 후회되는 장면 중 하나이다. 한 후임이 아무도 모르게 내무실의 약자들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사실을 자백받은 자리에서 결국 나는 그 후임을 때리고 말았다. 폭력을 폭력으로 응징했던 것인데 그런 류의 해법은 결국 근원적인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군생활을 마치고 나는 데미안 같은 그를 사석에서도 몇 차례 더 만났다. 이제 둘 다 민간인이고 동갑이니 말을 편하게 하라고 했지만 나는 굳이 그를 형으로 부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고 호칭은 단순히 형식적인 수사일 뿐 둘 사이의 신의와 우정에는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서로의 전화번호가 바뀌면서 연락은 자연스레 끊어졌고 내 인생의 모든 순간에서 또 다른 데미안 같았던 존재들은 SNS든 그 무엇을 통해서든 모두 연락이 닿았지만 그의 행적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가끔 마음이 헛헛할 때 잠자리에 옆으로 누워 스스로를 들여다 보면 그제야 동경하던 그의 모습과 조금은 닮아져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끼곤 하는데 그 때마다 나는 문득 그가 몹시 그리워 진다. 버텨 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그 시기에 기꺼이 싱클레어의 나침반이 되어 주었던 바로 그 데미안 말이다.

심규선 - Light & Shade Chapter.1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