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보다 일찍 선릉역에 위치한 조그만 사무실에 출근한 나는 평소처럼 사장과 내가 딱 한끼로 먹을 만큼의 쌀을 계량한 뒤 찬물에 씻어 낸다. 거기에 적당량의 물을 부어 밥솥에 넣은 뒤 취사 버튼만 눌러 주면 나머지는 전기 밥솥의 몫이다.
제대한 뒤 대학 동기의 소개로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중고차 업자들을 위한 소책자를 만드는 일이었다. 매일 아침이면 윈도우도 아닌 도스에서만 돌아가던 이름 모를 데이타베이스에 중고차 매물들을 입력하고 그걸 워드로 편집해서 A4 종이에 작은 글씨로 출력한 다음 간단한 표지와 함께 3등분으로 제본해서 간이 책자 형태로 만들면 되었다. 오후에는 그렇게 만든 책자들을 가방에 챙겨 수도권에 있는 중고차 매매단지를 돌아다니면서 모두 나눠주면 하루의 일과는 대략 끝이 났다. 지금 돌이켜보면 중고차 웹사이트가 생기기 한참 전이니까 사장은 꽤 사업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급여도 나름 후하게 주었던 편이라 복학하기 전 대학 등록금을 벌고도 꽤 돈이 남았었다.
그 당시 사무실에서 책자를 만들 때마다 늘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의 한 코너에서 사연과 함께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피아노곡이 있었는데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청취자들도 그 음악이 좋았는지 제목이 궁금했었나 보다. 하루는 진행자가 그 음악이 어느 뮤지션의 무슨 곡인지를 알려주었고 한참 일하고 있던 나는 잠시 펜을 꺼내서 그 내용을 메모했다.
그 곡의 제목은 'Andre Gagnon'의 'Les Jours Tranquilles'(조용한 날들)이었다. 그렇게 그를 알게 되었고 그의 음반들을 사모으면서 예술의 전당 야외 공연장을 찾아가 그의 연주를 직접 듣기도 했다. 이 노래의 볼륨을 적당히 높이면 피아노 건반 위의 손가락 진행에 맞춰 꾹꾹 밟는 페달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데 이 소리가 은근 듣는 이의 마음을 나른하게 만들곤 한다. 마치 고양이가 마음이 안정되거나 평온할 때 무심코 시전하는 '꾹꾹이' 같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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