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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 - 김영하 완벽한 선과 진실을 추구하며 섬세한 감정까지 지닌 지적 창조물과, 굳이 멀리 사이코패스까지 가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의외로 종종 볼 수 있는 빌런 류의 인간 혹은 종종 상대에게 가장 비수가 될 말을 궁리하는소심한 부류의 나 같은 사람들을 비교한다면 어느 쪽이 차라리 더 인간답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진정한 인간다움’과 ‘존재의 이유’라는 원초적인 주제 앞에 나지막이 질문을 던지며 끝난다. 결말에서의 쓸쓸함과 공허함을 바라보는 복잡한 감정 속에는 왠지 모를 슬픔이 분명 크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철학적인 주제를 위해 얼핏 공상과학 소설의 형태를 띄고 있을 뿐 실은 꽤 감성적인 작품이다. 더보기
불편한 편의점 - 김호연 친척들 사이에서 ‘걔 참 안됐더라.’로 대화를 이끌게 만드는 구성원이 한명 쯤은 있다. 무얼해도 일이 잘 안풀려서 걱정된다는 말투속에 내심 ‘우린 저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다행이지.’하는 우월감이 바닥에 깔리곤 한다. 은근 슬쩍 남과 비교하며 안도감을 느끼는 것은 어찌보면 인간의 못된 본능이니 우리는 좋은 싫든 본인의 삶이 가장 절실해야 한다. 그래야만 남 못사는 이야기를 그저 재밋거리로 삼지 않게 되니까. ‘불편한 편의점’의 주인공은 노숙자 출신이지만 우연한 계기로 인해 편의점 야간 알바를 맡게 된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참 안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저 묵묵히 들어 줄 뿐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문제가 어딘가로 말끔히 치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자신의 처지를 한 끗 다른 시선으로 살펴볼 자그마한 힘.. 더보기
산타는 있다. ‘너 그거 알아?’ 라고 초등학교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가 그 나이에 담을 수 있는 최대한의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뭐?’ ‘크리스마스마다 선물 준 산타 할아버지가 OO였다는거?’ 충격적인 사실을 마주하는 그 순간은 의외로 별 동요없이 무덤덤했다. 하지만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향하던 순간부터 마음 속의 물결이 점점 커져가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서 소중했던 존재가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져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느낌. 아마도 그게 첫 이별이었나 보다. 얼마 전 아이가 나에게 물었다. ‘아빠! 산타 할아버지 진짜 있는거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산타의 마지막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느꼈다. 조만간 그가 진실을 알아차리게 되면 나도 곧 은퇴식을 준비해야 하겠지. 하지만 며칠 후 선물을.. 더보기
순식간에 장면 전환된 그 곳은 기억이 희미하면서도 매우 익숙한, 그렇지만 유쾌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눈 앞에 보이는 조교에게 도대체 왜 내가 여기에 있느냐고 따져 묻는다. 심지어 나는 제대할 때 받은 전역증도 아직 보관중이라고 말했으나 전혀 통하지 않았다. (실제로 전역증을 아직도 고이 보관중이다.) 오히려 그는 내가 앞으로 하는 걸 봐서 특별히 병장 대우를 해주겠다고 한다. 어이가 없었다. 내가 원한 것은 그깟 병장 대우가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은데 막상 목소리가 크게 나질 않는다. 때마침 눈에 익은 간부 한명이 지나간다. 군대 시절 보통 중사급 보직에 때 아닌 원사님이 오신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분이었다. 그를 붙잡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물었다. 그가 아무런 대답없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 더보기
어린왕자와 사막여우 (부제: 택배) 그 다음날 어린 왕자는 다시 왔어요. 여우가 말했어요. "같은 시간에 오는 게 더 좋을 거야. 가령 송장번호가 뜨게 된다면 그 때부터 나는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집하가 되서 허브에 도착하면 그만큼 난 더 행복해질 거야. 우리 동네에서 배달 출발이 시작되면 이미 나는 불안해지고 안절부절못하게 될 거야. 난 행복의 대가가 무엇인지 알게 될거야! 하지만 네가 문자 한통없이 아무 때나 온다면, 몇 시에 마음의 준비를 해야할지 난 알 수 없을 거야... 의례가 필요해." 더보기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기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기. 퇴근길 라디오에서 이 말을 우연히 듣고서야 흐릿했던 머릿속이 선명해졌다. 그동안 내가 매우 불쾌하게 여겨 왔지만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했던 것. 예를 들어 자기 기분이 나쁘다고 그 일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화풀이하거나 짜증내는 그런 태도 말이다.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고 한 분야에서 날고 긴다고 하더라도 기분이 태도가 되어 버리는 부류의 사람들과는 결국 일순간도 함께 하기 어렵게 된다. 타인을 자기 감정의 화장실 쯤으로 여기는 사람은 경험상 타인의 감정에 대한 배려가 결핍되었을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 답은 오로지 과감하고 빠른 손절, 그 것 뿐이다. 더보기
포경수술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내게 물었다. “너 뭐 갖고 싶은 거 있니?” 라고. 그 때 진작 눈치 깠어야 했다. ‘인생에 공짜는 아무 것도 없다.’ 라는 그 오랜 진리를. 순진했던 나는 평소에 갖고 싶던 초합금 로봇을 말했고 돌이킬 수 없는 거래는 바로 체결되었다. 어느 날 나는 엄마 손에 이끌려 고래를 잘 잡기로 유명한 동네 피부비뇨기과에 끌려 갔고 순식간에 수술대 위에 바지를 내리고 누워 있었다. 외간 남녀들의 서걱 서걱한 가위 질 소리와 나의 오랜 동정(?)은 마침내 초합금 로봇으로 맞 바꾸어 졌다. 수술을 마친 후 수술 부위에는 종이컵이 끼워져 있었고 이후 서서히 마취가 풀려 가며 깨달았다. 고결한 정신 대신 물질을 택한 댓가는 참으로 혹독하다는 것을... 진통제를 먹어도 문득 문득 찾아오는 칼로 베.. 더보기
백화점 찬가 난 이상하게 백화점, 그 중에서도 특히 1층이 좋더라. 선물용 외에는 내가 살만한 물건은 1도 없는 곳이지만 여성 코스메틱 매장에서 브랜드별로 온통 뒤섞인 향기를 맡고 있으면 기분이 아주 나른하고 편안해진다. 그리고 남자가 에블린이나 빅토리아 시크릿 같은 여성 속옷 매장을 슬쩍 곁눈질이 아니라 유심히 바라보면 뭔가 변태가 된 느낌이지만 코스메틱 계열은 그런 류의 죄의식을 전혀 느낄 필요가 없다. 사실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를 대표하는 백화점 중에서도 1층은 가장 힘을 준 공간이기도 하고 무엇이든지 절정에 이른 것들은 본능적으로 매혹적이게 마련이니까. 난 그저 살짝 그 유혹에 따랐을 뿐. 돈이 안드는 향기로운 사치. 더보기